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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51a8MoN7bw

 

김기량 순교 현양비, 김기량 순교 기념관 (제주교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일주동로 1216

 

안녕하세요 성지순례하는 남자 이베드로입니다.
오늘은 제주도에 위치한 복자 김기량 순교 현양비를 다시 찾았습니다.
3년 전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잔디밭에 현양비와 성모상만 놓여있었습니다.
지금은 얼마 전 개관된 김기량순교기념관도 들어서면서
잘 조성된 순교 사적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순교기념관이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도 함덕리에서 중인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다니며 무역을 하였고 총명한데다가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고 있어서
주변에서는 김선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857년 2월 18일 배에 약재와 비단을 싣고 서귀로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됩니다.
한 달을 표류한 끝에 배 위에서 혼절하였는데
동료들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영국 이양선에 의해 구조가 됩니다.
중국 광동 해역에서 구조된 김기량은 
이후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80여 일 머무르면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게됩니다.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의 탄생이었습니다.
이후 육로로 중국 대륙을 거쳐서 조선 땅을 지나게 되는데
1858년 사순 제4주간에 배티 인근 교우촌에서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최양업신부 서한
최 신부는 김기량을 만난 뒤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그를 만나서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하심과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직하면서 자기가 제주도 고항으로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3개월간 교우촌에 머물면서 심신을 다진 김기량은
조천포를 통해 표류한지 1년 3개월 만에 제주도로 귀환하게 됩니다.

제주에 도착하여 가족과 이웃에게 먼저 선교를 시작하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1866년 무렵에는 40여 명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베르뇌 주교 서한 중 김기량
"루세이 신부 지도 아래 이 학생(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 난파자(김기량)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행히 금년에 조선에 들어와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나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베르뇌 주교의 1858년 8월 14일자 서한)

1865년에는 다시 폭풍을 만나 일본 규슈에 표착하게 되고
나사사키에 체류하며 프리장 신부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후 조선에 다시 귀국한 김기량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통영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치명하여 죽을 것이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 오시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살형으로 그의 목숨을 끊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관아에서는
교수형을 처하게 되고 되살아나지 못하게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장살형 :  사형방법 중 하나로 죽을때까지 때리는 것 
결국 1866년 1월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순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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