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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zSBiHMOL_E



이 영상은 2019년 8월 10일, 10월 20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인천교구 네곳의 성지를 두번에 나눠서 소개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주교는 개항지인 제물포에 코스트신부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시작하게 됩니다.


*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 조선 고종 23년(1886)에 조선과 프랑스가 수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


* 블랑 주교(Blanc, Jean Marie Gustave) :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코스트신부(Eugene Jean George Coste. 한국명 고의선(高宜善) 1842~1896)


코스트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1868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조선교구로 파견되기 전 만주에서 리델주교를 도와 성서번역과 한불사전을 편찬하였고

일본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1885년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운영했던 인쇄소를 옮겨와서 성서 등 보급을 담당하는 한편 

가톨릭 건축물 설계와 공사를 담당하였습니다. 

명동성당, 서울교구 주교관, 약현성당, 인천답동성당, 용산 신학교성당 등을 건축하였습니다.

또한 가톨릭출판사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후 빌렘 요셉((J.Wilhelm)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1889년 7월 1일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이름)을 설립하게 됩니다. 

1893년 3대주임 마라발 요셉(J. Maraval)신부가 본격적으로 성당 건립을 시작하였고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거행합니다.



처음에는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물이었으나

신자수의 증가로 인해 제4대 드뇌 신부 때 개축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3개의 종탑을 갖춘 현재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 교육사업 한 획 그은 ‘푸른 눈의 신부’ 드뇌 신부

Eugene Deneux, 한국명 전학준(全學俊, 1873~1949)

1896년 12월 사제서품

1900년 9월 인천박문학교를 설립

바오로 수녀원, 해성보육원 시설 확충

해성병원 개설 (현대식병원)




현재의 두번째 성당은 혜화동성당의 초대신부였고

원주교구 용소막본당을 신축했던

시잘레(Chizallet) 신부가 설계하였습니다.


*시잘레신부 Chizallet, Pierre(1882~1970).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은 지사원(池士元)






2019年 8月 10日 


답동 주교좌성당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 50번길 2


답동성당은 인천최초의 성당이자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입니다.

왼쪽 아래의 흰 건물은 이전하기 전 인천교구청 건물입니다. (현재 교구청은 송림동, 1부영상 성모당 위치)


1981년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적 제 287호 인천답동성당



정면에 3개의 종탑이 있고 벽면은 벽돌과 돌을 혼합한 모습입니다. 

창은 모두 반원형 아치형이고 아치부와 창대는 화강석 몰딩로 되어 있습니다.


정면 장미창 위에는 커다란 별이 보이는데요.

인천교구 주보성인인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Stella Maris)'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스텔라는 ’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신앙이라는 '배'를 타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항해하는 자들을 인도하는 '별' 이라는 뜻으로

성모마리아는 항해하는 우리들의 수호 안내자이며 보호자이심을 의미합니다.



내부는 콘크리트 열주(기둥)에 (양옆에 복도가 있는) 3랑식 공간으로 구성되어있고

다른 부분 도색과는 다르게 앱스부분은 진한 청색입니다.

아치형 창에는 무려 1979년에 설치된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볼수있습니다.


*답동성당 주보성인 성 바오로 상



순례자도장은 성당 뒤편에서 찍을 수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 (제3판, 2019.6.30발행)


답동성당 모양의 정말 예쁜 도장입니다.



*해성보육원

그리고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먹기살기 힘든 시기여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수녀들이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1896년에성당에 원사를 신축해 운영했습니다.

(현재 위치는 용현동)

설립후 지금까지 126년간 1만이 넘는 아이들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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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소개시켜 드릴 성지는 조선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 묘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참판 이동욱의 아들로 1756년에 서울 죽림동에서 태어나

진사시(進士試, 조선시대 소과의 하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않고

서학(천주교)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승훈은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는데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서적을 가지고 돌아온 뒤

이벽, 정약전, 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1785년 서울 명례방에서 가톨릭 집회를 여는 등

초기 천주교회를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동지사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친구 이벽의 부탁으로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게 되고 조선 최초의 영세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박해가 시작되면서 집안의 반대로 배교와 복교를 반복하다가

1786년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왔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밖에서 참수형을 당하며

순교하게 됩니다.



이승훈의 유해는 만수동 남동 정수장 뒤편에 묻혔었는데

1981년 경기도 광주 천진암성지로 옮겨져서

현재는 이곳에는 비석과 가묘만이 그의 아들 이택규, 이신규의 묘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승훈의 묘는 가묘이지만 이전하기 전까지 100년이 넘게 이곳에 묻혀 있어서

같이 묻혀있던 진토까지도 성역화 되었다고 인정되어

현재 순교 사적지로 인정되었습니다.






주차할 곳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근처에 주차를 하고 걸어올라가야합니다.

표지판으로 1.3km 산길을 올라가면 묘역이 나오는데

제 걸음으로는 왕복 약25분 정도 소요 되었습니다.



순례자도장은 예전에는 만수1동성당에서 찍어야했는데

지금은 묘소에 도장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도장찍을 선반이 없어서 불편하게 도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 (제3판, 2019.6.30발행)




지금까지 인천교구의 두개의 성지를 소개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촬영 해놓은 영상이 여기까지여서

다음 영상은 언제가 될지 기약을 못해드리겠네요.


앞으로 2주 정도가 고비가 될것 같은데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힘들더라도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천주교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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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봐주신 모든분들께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길 기도 드리고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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