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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rPw1ZV8HQU

살티공소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 (부산교구)
성지순례일 : 2021. 4. 15

 

오늘은 죽림굴에 이어서 영남지방의 교우촌이었던
살티공소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언양지역의 대표적인 교우촌이었던 간월과 죽림굴(대재공소)로 숨어들었던 신자들은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년을 겪으면서 
더 안전했던 '안살티'로 숨어 들었습니다.
안살티는 현재 청수골 주변인데 교우촌의 흔적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안살티에 숨어살던 신자들은 
현재의 살티공소가 있는 곳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고 살기 시작합니다.

 


살티(혹은 살틔)는 '무사히 살아 남아서 살수 있는 터'라는 뜻입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100m정도 걸어서 공소까지 들어가셔야 합니다.

※공소까지 차몰고 들어가지 마세요.

 

공소밖 스탬프함은 <한국천주교성지순례> 책자 스탬프가 아니라 <울주천주교순례길>스탬프입니다.

잘못찍은것입니다.

 

공고안 뒤쪽에 도장이 두개가 있는데 왼쪽도장은 언양성당 도장이고 오른쪽 도장이 살티공소 도장입니다.

<한국천주교 성지순례>책자에는 이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김영제 묘와 김아가다 묘가 있습니다.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 (1827-1876)
김영제(베드로)는 언양 최초의 신자였던 김교희 프란치스코의 손자입니다.
김영제는 경신박해(1860년)때 아버지 김상은(야고보)와 함께 체포 되었다가
풀려났지만 무진박해(1868년) 때 죽림굴(대재공소)에서 잡혀 경주로 압송됩니다.
경주감옥에서  허인백, 이양득, 김종륜을 만나 순교를 결의했으나
허인백등 3명은 울산으로 이송되었고 김영제는 중죄인 판결을 받고 서울로 끌려갑니다.
9개월간 감옥에 갇혀 선교사와 교인들의 소재지를 추궁당하며 
심한 고문과 문초를 받아 
종지뼈가 떨어져 나간 불구의 몸이 됩니다.
1869년 봄 국가의 경사로 특별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살티공소(1869년)를 설립하여 회장직을 맡았았습니다. 
하지만 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피고름이 흘러 한겨울에도 한쪽 바지를 걷어올린채 
고통속에서 살다가 결국 낫지않고 악화되어 1876년 장하순교합니다.

* 동정녀 김 아가다(1836-1860)
동정녀 김아가다는 김영제의 여동생입니다.
아버지와 오빠가 포졸들에게 잡혀가자 자신도 자진체포 됩니다.
하지만 포졸이 자신을 팔아넘기려는것을 알고 최양업 신부가 숨어있는 죽림굴로 도망쳐 은신합니다.
3개월간 식사준비, 빨래 등을 하고 신부님이 만든 짚신을 내다 팔고 구걸도 해가며 신부님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 몸이 점점 약해지며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1860년 최양업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선종합니다.
※최양업 신부 열아홉번째 서한에는 김아가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최양업 신부 열아홉번째 서한 中
스물네 살 쯤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이 특출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서 뛰어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를 간절히 자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는 포졸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교우들의 강요에 따라 마지못해서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처녀들과 함께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두 처녀 중 하나는 열일곱 살이고, 하나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이 동정녀가 선생처럼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처녀들이었습니다.
 포졸들이 오자 그녀는 자기도 아버지와 오빠와 같은 종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감옥으로 잡아가 달라고 자원했습니다.
이때 두 처녀들도 이 동정녀를 본받아 같이 잡혀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세 처녀의 엄지 손가락을 묶어가지고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포졸들은 그 처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농락하거나 다른 데 팔아먹으려 하였습니다.
포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포졸들에게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포졸들의 짐승 같은 욕정을 진정시켜서 처녀들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들 중에서 큰 동정녀의 이름은 아다가였습니다. 
아가다는 아버지와 오빠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돌봐주는 이나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숱한 위험을 겪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결국 저에게로 피신하여 왔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다는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임종경의 마지막 경문을 끝내자 아가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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