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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일 : 2021. 2. 10

광희문성지(광희문 순교자 현양관) :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안녕하세요 성지순례하는 남자 이베드로입니다.
오늘은 광희문성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광희문(光熙門)은 1396년(태조5년) 한양 도성을 창건할때 세운 사소문 중 하나입니다.
광희문은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요.

 

 

 

*오간수문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도성에서 성 밖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웠기에
수구문(水口門)이라고 불리었고

*1907년 8월초 군대해산에 저항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밖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

도성에서 성 밖으로 시신들이 나가는 출구라고 하여
시구문(屍口門) 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성안에 거주하던 이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성밖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서 장례 행렬이 나갔던 문이고
옥살이 하던 죄수들이 병사, 장살, 교살 되면 형졸들이
그 시신을 버렸던 곳입니다.

 

1890 광희문모습
1900년대초 광희문 밖 모습
1907년 8월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대한제국 군인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버려 가족들이 찾고 있는 모습


박해시대 때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 중 
가족이나 교우들에 의해 수습된 극소수의 순교자들도 있으나
체포의 위험과 가난한 형편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에 싸서 광희문 밖에 버려졌습니다. 
그 중 이름이 밝혀진 인원만 794명에 달합니다.

 


794명 중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순교하였습니다.

 

이들 순교자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16위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 가룰로 등 7위,
총 23위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 바르바라 등 3위와
1867년 순교한 송 베네딕토 가족 3위, 총 6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833년~1879년에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 등 24위가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습니다.

당시 옥에 갇힌 천주교 신자들은 
죄수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보온과 냉방규정, 신체를 보전하기 위한 고문에 대한 제재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남형한 형리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옥 일한 30일을 두배씩 넘긴 67일동안 구류되기도 하고 
2~3일에 한번씩 형장 30대 이하로 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겪었던 감옥생활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 서한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페레올 주교 (1808∼1853)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1감옥소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줄지어 선 여러 판잣집이 있다.
집을 드나드는 매우 작은 문은 있지만, 창문은 전혀 없어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
겨울에는 추위로, 여름에는 더위로 견딜 수가 없다.
바닥에는 거친 짚으로 엮은 멍석이 깔려있다.
(좁은) 감방 안에 갇힌 신다들이 하도 많아서 다리를 뻗을 수조차 없다.

A-2끔찍스러운 감방에서 당한 고통은 위에 언급된 고문보다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신자들 모두가 증언했다.
왜냐하면 매맞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고름에 젖은 멍석이 이내 썪어서
사방에 퍼진 악취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A-3 그러나 신자들을 가장 가혹하게 괴롭힌 것은 굶주림이다.
다른 고문을 견뎌냈던 몇몇 사람들도 배고픔 앞에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갇힌 신자들은 주먹만한 분량의 좁쌀을 하루에 두번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깔고 누워 있던 썩은 멍석을 뜯어 먹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감옥 안에 이, 벼룩, 빈대가 어찌나 많았는지, 갇힌 신자들이 그것을 한 움큼씩
쥐어 잡을 정도였다. 그들은 죽은 그것을 끔찍하게 먹기까지 했다.

 


또한 처형 방식에 대해서도 
교우들의 증언과 관가의 기록이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관가에서는 장폐 곧 매를 쳐서 죽이는 장사형으로 처형했다고 하나
교우들에게는 교수형으로 순교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명백하게 불법이지만 관가의 관행이었던 장폐는
죽을 때까지 무자비한 매질을 가하는 방법이었는데
남형에 속하는 장형을 받고도 사람에 따라
즉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경우에는 바로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형을 실시했습니다.

김임이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 우술임 수산나 등이 장형으로 죽지 않자
교수형을 집행하여 순교 하였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 될 경우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형으로 순교하는것을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옥사'보다 '참수'를 더 열망하였고 '옥사'를 당할까봐 두려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광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비참하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2018.4.8 광희문 성지 순교자현양관 축복식

광희문 밖은 오랜기간 잊혀져 오다가
2013년 천주교 서울순례길에 광희문을 포함시키고 
2014년 8월 故한정관 바오로 신부께서 담당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서 성지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광희문성지(광희문 순교자 현양관) :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순례도장은 성지에 들어오셔서 바로 오른쪽 테이블에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 (3판)

3층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유해 (척추뼈)
사진 전시실(4층)

십가고상 우측에는 지향을 담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도 지향을 종이에 써서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지금까지 광희문성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오늘도 제 영상을 봐주신 모든 분들과
몸이 불편하신 분들, 병과 싸우고 계신 분들께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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