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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Hro56aLx9M


어농성지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

031) 636-4061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어농성지는

1795년 을묘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는 성지입니다.



조선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던 

첫번째 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밀사 최일길 마티아,지황 사바를 비롯해

조선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

신부님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던 강완숙 골롬바,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 사촌인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 정광수(바르바나) 부부

등 총 17위의 순교복자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첫번째 교회 밀사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지도자

지황 사바              (1767~1795) 두번째 교회 밀사


주문모 야고보         (1752 ~1801) 조선 첫번째 신부

윤유오 야고보         (   ?  ~ 1801) 지도자

윤운혜 루치아         (   ?  ~ 1801) 연락원, 성물 성화 보급

정광수 바르바나      (   ?  ~ 1802) 지도자, 성물 성화 보급

윤점혜 아가타         (   ?  ~ 1801) 한국 최초의 동정녀 공동체 회장

강완숙 골룸바         (1761~ 1801) 회장, 주문모 신부 모시고 활동

조용삼 베드로         (   ?  ~ 1801) 독신

최창주 마르첼리노    (   ?  ~ 1801) 양반 

이중배 마르티노      (   ?  ~ 1801) 양반

원경도 요한           (1174 ~ 1801) 양반

심아기 바르바라      (1783 ~ 1801) 동정

정순애 바르바라      (1777 ~ 1801) 동정

홍필주 필립보        (1774 ~ 1801) 지도자

한덕윤 토마스        (1752 ~ 1801) 지도자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양근으로 이주하여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며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그후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게되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칩니다.

1789년 교회의 지도자들은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보내는 밀사로 윤유일을 뽑게 되고

그 후 북경을 오가며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려는 첫번째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동료밀사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유일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밀고자로 인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체포되어 지황, 최인길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고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한뒤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 되었으나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주신부는 마티아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강완숙은 양반 집안 출신이었는데, 조선의 풍습에 따르면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가택 수색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간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주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중국어를 하며 집에서 포졸을 맞이합니다.

결국  동료 밀사 윤유일, 지황과 함께 체포 되었고 순교하게 됩니다.










지황 사바 (1767~1795)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습니다.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했으며 천주교에 입교한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에만 열중했습니다.

1793년 윤유일(바오로)와 함께 밀사로 선발되어 사제의 영입을 위해 노력합니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밀고자로 인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체포되어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윤유일, 최인길, 지황은 체포된 뒤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주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결국 박해자들에 의해 맞아서 숨을 거뒀고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1752 ~1801)

1752년 중국 강남에서 태어난 주문모신부는 

최초의 외국인 사제로 6년간 조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신자수가 4천여명에서 1만명까지 증가할 정도 였습니다.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강완숙을 조선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주문모신부는 강완숙의 보호로 몸을 피하고

청나라로 피신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 '내가 당신들이 찾는 천주교 신부'라고 자수합니다.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 49세의 나이로 한양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군문효수형)

주문모 신부가 순교할때 기이한 형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천주교를 위해 죽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고는 칼을 받는순간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갑자기 구름으로 덮였고,

 거센 바람이 일더니 번개가 온 하늘을 가르고 천둥이 울리며 

흙이 섞인 비가 억수같이 내려 주위가 물바다로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신부님이 숨을 거두자 폭풍우는 가라앉고 해가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

참혹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머리를 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닷새 동안 나무 끝에 매달려 있었는데, 

매일 밤 무지개 같은 환한 빛이 시신 위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시신은 포졸들이 교우들 모르게 매장하여 그 보배로운 유해는 찾지 못하고,

어농성지에는 가묘를 조성하여 현양하고 있습니다








사무실, 성당 건물입니다.




순례자도장은 성당에서 찍을수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 (3판, 2019.6.30발행)




현재 청소년 피정의 집이 완성된게 아니라서 기금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파평 윤씨 선산을 기증받은 수원교구는 이곳을 순교자 17위를 현양하는 공간으로 일궜습니다.

현재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제외한 16의 묘가 모두 가묘로 조성되어있습니다.


















아래는 유튜브 채널 주소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MAjlBRKQmWImUOoDmTrX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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